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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물 들어봤니] 애니 앨러스 선교사 (Annie J. Ellers)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강눈물 댓글 0건 조회 639회 작성일 20-04-06 14:15

본문

오늘 '이런 인물 들어봤니' 코너에서 만나볼 신앙의 선배님은
애니 앨러스(Annie J. Ellers) 선교사입니다. 

애니 엘러스와 번커 부부는 소속 교단을 변경하는 비교적 특수한 경험을 하면서 오래 전부터 교단이 연합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한글성서, 찬송가, 문서선교, 교회일치 등에 있어 지대한 공헌을 한 이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이들의 이러한 전반적인 선교활동에 대해 ‘에큐메니컬(Ecumenical)’이라는 용어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다.


한글성서

한글성서의 출판과 보급은 엘러스와 번커 부부의 선교활동 가운데 주요 업적으로 평가될 만하다. 한글성서는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만주와 일본에서 성서번역 및 반포가 진행되는 제작과정을 거쳤다. 만주의 ‘예수성교본’은 스코틀랜드성서공회와 대영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다. 일본의 ‘이수정본’은 미국성서공회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의 선교사들은 이 두 가지 성서를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번역에 착수했다. 엘러스와 번커 부부는 성서 번역보다는 성서의 출판 및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선교사들이 새롭게 번역한 신약성서 단편들이 국내에 속속 출판되었는데 이들 부부가 같이 일하던 감리회출판사에서 모두 출간되었다. 번커 부부가 한글성서 제작을 위해 일본 요코하마에서 한글 활자를 미리 제작해 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번커는 미국성서공회를 대표해 스코틀랜드성서공회와 대영성서공회 세 성서공회가 연합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연합공회의 조직과 지원으로 구약과 신약 모두를 포함한 한글성서를 신속하게 번역하고 널리 보급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번커는 엘러스의 도움으로 상임성서위원회의 회계 업무를 맡으면서 한국에서 성서에 대한 요구가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번커 부부는 3국 성서공회 연합이 깨진 이후 1911년 6월 베크에게 미국성서공회 한국지부 총무를 인계할 때까지 한글성서의 출판과 보급에 최선을 다하였다.


찬송가

초기 한국 기독교 공동체에게 성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찬송가였다. 당시 찬송가는 각각의 교단에서 사용하는 게 따로 있었다. 엘러스와 번커가 한국 찬송가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이 사실은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등재돼 있는 한국 최초의 악보가 실린 책은 1894년 언더우드의 ‘찬양가’인데 이 때부터 번커 부부의 찬송가 작업이 시작됐다. 찬송가 편찬 과정에서 선교사들이 가장 어려워했던 건 가사와 곡조를 결합하는 것이었는데 이들에게 이 작업이 주어진 것이다.

감리회의 ‘찬미가’ 편찬위원으로 시작한 이들의 작업은 한국 전체 교회가 하나의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한 1908년 ‘찬숑가’가 나올 때까지 계속됐다. 한글 가사와 곡조를 결합해 찬송을 찬송답게 만드는 일을 감당했던 것이다. 당시 찬송가 편찬 위원으로는 프레드릭 밀러와 애니 베어드가 있었는데 이들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 여러 곳에 이름이 남겨져 있다. 밀러와 베어드가 가사의 번역과 수정을 전담했다면 번커는 아무 이름도 남기지 않고 지금 한국교회가 부르는 찬송가 대부분의 가사와 곡조를 조화롭게 연결시켰다.


문서선교

앨러스와 번커 부부는 감리회출판사를 운영하기 이전부터 1890년 6월 25일에 창설된 ‘죠션셩교회’(The 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를 중심으로 문서선교를 전개했다. 특히 번커는 창립모임 때부터 이사로 선임됐으며 선교사 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서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활동했다. 올린저, 언더우드, 게일에 이어 1905년에서 1908년까지 제4대 회장을 역임했고 이후엔 재단이사 등으로 참여하면서 기독교서회의 문서선교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기독교서회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교단이 함께 참여하는 강력한 에큐메니즘에 있었다. 서회는 처음부터 실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와 심의위원회(Examining committee)를 별도로 구성해 서로 견제하게 하는 한편 심의위원회의 경우 동일 교단에서 2명 이상의 위원을 낼 수 없도록 규정해 특정 교단의 출판 독점을 방지했다. 번커 부부는 서회가 한국의 기독교 문화 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평생을 헌신하였다.


한국의 민족교회, ‘대한예수교회’

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의 순직으로 담임목사를 잃은 정동교회는 10월 1일부터 번커에게 정동교회의 담임목사 직분도 맡겼다. 당시 번커는 배재학당 당장으로 활동 중이었다. 1905년 6월 24일 정동교회에서는 교육 사업의 연합을 위한 비공식 회의가 열렸다. 이를 위해 구성된 연합위원회가 26일 저녁 번커의 집에 모였는데 이 때 서울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참석했다. 번커는 해리스 감독에게 사회를 요청하고 8시 30분에 회의를 시작했다. 모리스와 휴 밀러가 이 회의의 서기로 선정되었다.

게일의 기도 후 레이놀즈는 ‘대한예수교회’라고 칭하는 하나의 한국민족교회(One Korean National Church)를 설립할 때가 무르익었다는 내용의 안건을 제기했다. 이 안건은 에비슨의 제청 이후 표결에 부쳐졌는데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도·교육·의료·여성 등 선교 사업 전반에 걸쳐 연합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들이 모색되고 실천되었다. 이러한 연합 사업은 특히 ‘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첫 번째 회장에는 언더우드가, 그리고 회계 및 서기에는 번커가 선출되었다.

이 조직은 1911년 ‘재한개신교선교부연합공의회’로 변경됐다. 여기에 선교사들의 지도력보다는 한국교회의 역할을 강조하며 1918년에 별도로 조직된 ‘조선예수교장감연합회’가 합쳐져 1924년 9월 24일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가 창설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엘러스와 번커 부부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특히 에큐메니컬 선교활동에 상당히 주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글 : 이용민 박사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연구이사)
[출처] 국민일보
[원본링크]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347313&code=23111117&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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